[국어정책토론회] [6·끝] 대학 영어강의 의무화해야 하나

조선일보 문화 토론  기사 입력: 2011.09.06 03:10
올해 1학기 전국 127개 대학에서 영어로 강의하는 강좌는 전체 평균 7.9%에 이른다(한국대학교육협의회 집계). 세계화 바람과 함께 대학가에서도 영어 강의가 늘고 있다. 하지만 환영일색만은 아니다. '세계 공용어 사용을 활성화해야 한다' '외국인 유학생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찬성론에 대해 '영어 강의 기반이 안 돼 있다' '수업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반론이 맞선다. 국어학회·본사가 주관하고 국립국어원이 주최하는 국어정책토론회 마지막 6회 주제는 '대학 영어 강의를 의무화해야 하는가'...

8일 목동 방송회관에서 진행될 토론회에는 임동훈 이화여대 국어국문과 교수와 서의호 포항공대 산업경영공학과 교수가 토론자로 나선다.


[영어강의 필요하다] 학생이 원하고 교수 영어 유창하면 만족도 높아

▲ 황종배 건국대 영어교육과

얼마 전 국민의 관심을 끌었던 카이스트 사태 배경 중 하나로 '영어 강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대학 수업을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진행하는 것에 대한 학생들의 심리적 부담은 사실 카이스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학이 안고 있는 시급한 현안 중 하나다. 카이스트 사태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카이스트의 일부 학생과 교수가 느끼는 학습 및 강의 부담과 부작용을 크게 부각하는 동시에 다른 많은 대학에서 실시하고 있는 영어 강의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언론의 많은 비판과 몇몇 영어 강의 효과에 대한 검증을 시도한 연구를 보면 전공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대학 평가를 위한 무분별한 영어 강의 확대에 대한 비판이나 영어 강의의 문제점 지적에 그친 감이 있다.

필자는 최근 서울의 한 대학 영어영문학과 학생들을 상대로 전공과목 강의를 영어로 했을 때와 한국어로 했을 때 효과를 비교, 조사했다. 그 결과, 학습자들의 전공 지식 습득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영어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이 한국어 강의를 들은 학생들보다 강의 만족도와 흥미도에서 더 높았다. 영어 강의에 대한 부정적인 이유가 학생들의 불편함과 그에 따른 학습 흥미와 강의 만족도 저하라고 할 때, 이 연구 결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연구에 참가한 학생들이 영어 전공자들이고, 영어로 강의한 교수 역시 영어가 유창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필자의 연구를 전체 영어 강의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연구의 한계점은 바로 우리 대학이 추구해야 할 영어 강의의 방향을 보여준다. 대학의 영어 강의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첫째, 수강 학생들이 영어 강의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영어 능력을 향상시키려는 적극적인 동기가 있어야 한다. 둘째, 영어로 강의하는 교수들의 영어가 유창해야 한다. 영어로 된 수업 자료를 전달하는 데 급급해서는 안 되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앞으로 연구에서 밝혀야 하겠지만, 강의 언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자칫 국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나 국어 능력 발달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 이런 조건들을 충족한 상태에서 대학에서 선별적으로 영어 강의를 한다면 학생과 교수 모두 상실감과 무력감보다는 흥미와 자신감을 느끼는 수업이 가능할 것이다. / 황종배 건국대 영어교육과


[영어강의 신중해야] 영어로 논문 발표하는 佛·獨 대학도 의무화 안해


▲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현재 진행되는 대학 영어 강의는 수사적(修辭的)으로 매우 근사해 보이지만 실체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우선 대학에서 제공하는 영어 강의의 목적이 뭔지 불분명하다. 유럽 대학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처럼 영어 강의는 외국 학생들을 위해 개설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만약 우리나라 학생들의 영어 능력 향상을 위한 것이라면 별도 영어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외국 학생들을 위한 것이라면 질 높은 영어 강의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나라 학생들은 영어 능력이 달려서 영어 강의를 못 따라가고, 외국 학생들은 교수 영어가 형편없거나 자신도 영어가 부족해서 수강에 어려움을 느낀다.

더불어 학부 학생들을 상대로 한 영어 강의는 신중해야 한다. 신입생들은 대학의 영어 강의를 들을 준비가 돼있지 않으며, 학부 학생들이 영어 강의 때문에 전공 지식을 희생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영어가 전공이나 교양에 우선할 수는 없다. 2003년 서울대 대학생활문화원 조사를 보면, 대학을 졸업한 지 5년이 지난 졸업생들은 대학 교육에서 주요한 16가지 능력 중 영어를 최하위로 꼽았다. 영어 독해 능력 12위, 영어 회화 능력 15위, 영어 글쓰기 능력은 16위였다. 무엇을 대학에서 집중해서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지 보여준다.

또 다른 문제는 영어 강의를 모든 학문 분야에 일괄 적용한다는 것이다. 모든 학문 분야에 영어 강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프랑스나 독일의 자연과학 분야 학자들도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며 서울대 수학과 물리학 석사 및 박사 논문도 거의 100% 영어로 발표한다. 그렇다고 이 대학들이 영어 강의를 의무화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어로 가르치는 것과 영어로 학문을 하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섣부른 영어 강의를 둘러싼 문제점은 수없이 많다. 영어 강의 때문에 강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미래의 일이지만 무분별한 영어 강의로 우리말로 이뤄지는 학문 생태계가 위협받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따라서 영어 강의는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분야별로 대학 사정을 고려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획일적으로 모든 분야에 영어 강의를 의무화하거나 학생이나 교수의 영어 구사 수준 그리고 영어 강의를 도입하는 목적을 고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 /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